독일중세극
독일중세극은 그리스나 로마의 전통적 유산을 계승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중세 자체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중세인들은 그리스나 로마연극의 전통적 유산을 전적으로 무시해버렸다. 심지어 배우들을 도둑, 매춘부등의 사회악(社會惡)으로 취급하여 국경밖으로 추방 내지 화형에까지 처해버렸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연극은 기독교적 신앙을 중심으로 해서 성장했기 때문에 반(反)기독교적인 연극은 모조리 배척해 버렸다.그래서 그리스인에 의해 착수된 예술연극의 전당은 로마를 거쳐 중세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 후 연극형식은 교회안의 미사집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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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in | 외국문학연구 no. 7; pp. 11 - 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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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Author | |
Format | Journal Article |
Language | Korean |
Published |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00
외국문학연구소 |
Subject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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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444X 2671-8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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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 독일중세극은 그리스나 로마의 전통적 유산을 계승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중세 자체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중세인들은 그리스나 로마연극의 전통적 유산을 전적으로 무시해버렸다. 심지어 배우들을 도둑, 매춘부등의 사회악(社會惡)으로 취급하여 국경밖으로 추방 내지 화형에까지 처해버렸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연극은 기독교적 신앙을 중심으로 해서 성장했기 때문에 반(反)기독교적인 연극은 모조리 배척해 버렸다.그래서 그리스인에 의해 착수된 예술연극의 전당은 로마를 거쳐 중세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 후 연극형식은 교회안의 미사집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는 교회 앞마당으로, 그리고 나서는 시장으로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세에서 자생된 독일의 중세연극을 그리스․로마의 고대연극과 비교하여 볼 때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리스극이 귀족적이고 로마의 연극이 이민적이었다면 독일중세 연극은 서민적이고 평민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박애와 평등정신 밑에서 누구나 연극적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참여한 평민들은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맹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치고 기독교의 교리를 포교하기 위해서는 추방된 재래의 반(反)기독교적 연극행위를 교회안으로 끌어들여 기독교적 연극행위에 동화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특히 10세기에서 12세기에 유럽에서는 새로운 카톨릭 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히 기독교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극예술을 총동원하여 포교에 전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세독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중세의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의 전통극을 탄압했고, 그로 인해서 극의 전통이 상실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근대국민극에, 특히 렛씽의 국민연극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고, 나아가서는 그 활동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런 기독교적 종교극 이외에 기독교적 예식을 가장한 원시적인 토속적 유희와 세속극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이 토속극과 세속극의 업적은 종교극의 무대를 교회 내부로부터 교회 앞마당으로, 그리고는 장터를 중심으로 한 시중(市中)으로 옮기고 마침내 르네상스극의 탄생을 보게한데 있다. 그래서 본논문에서 다룰 중세독일극에서는 우선 종교극과 세속극에 영향을 준 토속극, 그리고 종교극과 세속극의 순서로 살펴보겠다. Die vorliegende Arbeit versucht, das Drama des deutachen. Mittelalters, besonders des Spätmittelalters zu analysieren. Konkret dargestellt handelt es sich um das volkstümliche Spiel, das geistliche Drama, und das weltliche Spiel.
In der Form ist das volkstümliche Spiel nicht mehr als eine primitive Jahresfeier, denn es von dem polytheistischen Ideengut geerbt worden ist. Die typische Jahresfeier ist zum Beispiel die vorchristliche Fruchtbarkeitsriten.
Das geistliche Drama, die von den liturgischen Feiern zur Weichnachts-, Passions- und Osterzeit ausging, hatte mit der Zeit eine immer stärkere Belebung der zunächst streng stilisierten religiösen Darstellung produziert. Langsam wurde der Text über kirchlich-hymnische Gesänge und liturgische Wechselreden hinaus erweitert. Dann traten die realistischen od. weltlichen Episoden hinzu. Die Gläubigen und Zuschauer begnügten sich nicht mehr mit der strengen kultischen Feier, sondern wollte etwas Fesselndes und Unterhaltendes sehen und hören. Das Mimische (La. mimicus; Gr. mimikós) setzte sich, dem Volksempfinden entsprechend, gegenüber dem Sakralen durch. Schließlich wurde der Kirchenraum (das Innere und der Hof) zu eng, und das sich sinnenkräftig entfaltende geistliche Drama ist die Bühne auf den bürgerlichen Marktplatz umgezogen. Es kam in die Hände von städtischen Spielmannschaften. Ihr Ehrgeiz veranstaltete große Massenaufführung.
Das weltliche Darma wurde in die andere Gestalt transformiert : Das Fastnachtsspiel, das vor allem aus Nürnberg von Hans Rosenplüt, Hans Falz, und Hans Sachs überliefert ist, sich aber als fester Gattungstyp in ganz Deutschland verbreitet fand, war gänzlich ein Volksspiel, das vom Volk für das Volk in dem Gasthaus, auf der Gasse und auf der Straße zur Faschingszeit aufgeführt wurde. Es geht auf vorchristliche Fruchtbarkeitsriten in Handlung und Figuren zurück ; aber das ursprüngliche Brauchtum entartete, seines sakralen Gehalts beraubt, zum grotesken Komik, zu derbstem, obszönem Realismus, der ein wildes Narrentreiben entfaltete und darin auch sehr aktuelle persönliche Satire versteckte. KCI Citation Count: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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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 G704-000727.2000..07.001 |
ISSN: | 1226-444X 2671-8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