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이후 한중일 3국의 유학 전개와 특징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은 모두 성리학을 관학화하였으나, 유교 전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국의 청대 조정은 지속적으로 문자옥을 일으키고, 대규모 총서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학자들은 명대의 양명학[심학]을 수용하거나, 중화멸망이라는 상황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송명대의 이학(理學)과 심학(心學) 전통에서 벗어나 문자 고증(考證), 훈고(訓詁)에 집중하였고, 경학과 고증학을 기반으로 의리학 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으로 경세(經世)와 실용(實用)을 강조했다. 일본의 에도막부 역시 성리학을 관학화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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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inYulgok sasang yŏn'gu Vol. 55; pp. 85 - 113
Main Authors 김문준, Kim Moon Joon
Format Journal Article
LanguageKorean
Published (사)율곡연구원 31.03.2024
(사)율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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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17세기 이후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은 모두 성리학을 관학화하였으나, 유교 전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국의 청대 조정은 지속적으로 문자옥을 일으키고, 대규모 총서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학자들은 명대의 양명학[심학]을 수용하거나, 중화멸망이라는 상황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송명대의 이학(理學)과 심학(心學) 전통에서 벗어나 문자 고증(考證), 훈고(訓詁)에 집중하였고, 경학과 고증학을 기반으로 의리학 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으로 경세(經世)와 실용(實用)을 강조했다. 일본의 에도막부 역시 성리학을 관학화하였으나, 유학이 주류인 시대는 없었다. 일본사회는 항상 병영국가로서 병학(兵學)이 중심이었다. 에도시대 초기에 퇴계학을 바탕으로 성리학이 시작되었으나, 점차 독자적인 고학(古學)으로 발전하면서 국학(國學)을 형성하였고, 주자학, 심학, 난학. 국학 등 다양한 학문이 병존했다. 조선 유학자들은 양란 이후, 일부 학자들이 심학, 실학, 고증학 등에 관심을 가졌으나, 주류학자들은 주자학을 절대화하고 예학과 춘추의리 정신을 심화하면서, 도통의식과 조선중화주의를 강화했다. 이를 기반으로 문화적 주체성을 고양하고, 조선이 문명 중심이며 인류문명의 주역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존중화 양이적’(尊中華·攘夷狄)을 표방하면서 중국와 일본의 학술문화를 천시하고, 타사상에 대해 폐쇄적이고 배타적 태도를 보였다. 이와 같이, 17세기 이후 한중일 각국은 주자학을 관학화하였지만, 유학 전개 양상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전개 양상을 보였다. Since the 17th century, changes of Confuciansm in the three countries of East Asia, Korea, China, and Japan have shown different patterns. The Qing government made the study of Zhu Xi a government study, but caused Text suppression and made a collection of scriptures and books on a large scale. Under these circumstances, Confucian scholars accepted the study of Yangming [Learning of the Mind], which developed in the Ming Dynasty, and as a reaction to this, they moved away from the Songming Dynasty's Learning of the Principles and Learning of the Mind traditions and focused on the Bibliographic Study(考證), the study of annotating scriptures(訓詁), and based on these studies, pursued the spirit of 'Seeing the facts and the right'(實事求是), emphasizing the ruling the world(經世) and practical use(實用). Japan's Edo Shogunate made the study of Zhu Xi into a government study, but there was no era in which Confucius studies were mainstream in the Edo Shogunate era. Japan has always been in a militaristic state, focusing on the Study of Military as the center, the study of Zhu Xi, the study of Yangming, and Dutch studies. The National Study of Japan coexisted. Early in the Edo Shogunate Period, the study of Zhu Xi began based on the study of Toeye, but gradually developed into the study of animating scripts, forming the National Study of Japan. After the Japanese Invasion and the Qing Invasion, some scholars became interested in the study of Yangming, the practical learning, and the archaeological Bibliographic Study, but mainstream scholars made the study of Zhu Xi absolute and deepened the spirit of Ye(禮) and the justice in Chunqiu(春秋義理), strengthening the Consciousness of the Confucian Orthodoxy of the Dao and Joseon-Sinocentrism. Based on this, they raised their cultural subjectivity, strongly expressed the consciousness that Joseon was the center of civilization and the lead actor of human civilization, neglected Chinese and Japanese academic culture, and showed a closed and exclusive attitude toward other countries. As such, the development of Confuciansm in Korea, China, and Japan since the 17th century has been making the study of Zhu Xi into a government study, but different developments have been shown depending on historical circumstances.
Bibliography:Yul Gok Society
ISSN:1738-8236
DOI:10.35436/yulgok.2024.55..85